p96
일하는 걸 바라. 너의 성(性)으로 보아 높이 올라갈 기회는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회사에 충성을 다하기를 바라.
일을 하면 돈을 벌게 될 거야. 돈을 번다고 기쁨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어 결혼할 때 그걸 내세울 수는 있을 거야.
사람들이 네 본연의 가치 때문에 너를 원한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이제 끝없이 이어지는, 네가 져야 하는 쓸데없는 의무가 시작되지.
너는 나무랄 데가 없어야 돼. 그게 아주 최소한이라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나무랄 데 없다고 해서 그냥 그렇다는 사실 말고 뭔가가 특별히 생기는 것도 아니야.
이건 긍지도 아니고 즐거움은 더더욱 아니지.
예를 들어, 방광의 압박을 덜어 줘야 하는 보잘것없는 필요 때문에 화장실에 혼자 있을 때조차
네 시냇물에서 졸졸졸 나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하게 신경 써야 하는 의무가 있어.
그러니 넌 쉴 새 없이 물을 내려야 할 거야.
이제 하려고 하는 얘기를 네가 이해했으면 해서 그런 예를 드는 거야.
네 존재에서 그만큼 은밀하고 별것 아닌 부분까지 지시에 따르게 된다면,
네 삶의 핵심적인 순간들에 가해질 제약은 당연히 얼마나 클지 한번 상상해 봐.
배가 고프다고?
먹눈 둥 마는 둥 해.
길에서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네 몸매를 쳐다보는 ㅡ
그들은 그러지 않을 거야 ㅡ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집이 있는 게 수치스러우니까 날씬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야.
너는 아름다워야 할 의무가 있어.
아름답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해 네가 기쁨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거야.
네가 거울 속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감탄할때도 틀림없이 흐뭇한 마음이 아니고 두려운 마음일거야.
왜냐하면 그 아름다움은 상실에 대한 공포 말고는 아무것도 네게 주지 못할 테니까.
네가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해서 별로 대단한 건 아니야.
하지만 아름답지 않으면 또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지.
너는 결혼할 의무가 있어.
네 유통기한인 스물다섯살 전에 하면 더 좋고.
모자란 사람이 아닌 한, 네 남편은 너한테 사랑을 주지 않을 거야.
또 모자란 사람한테 사랑을 받아 봐야 행복하지도 않고.
어찌 되었든 간에, 그가 너를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너는 그를 볼 기회가 없을 거야.
새벽 2시, 한 남자가 녹초가 된 데다 종종 만취 상태로 집에 들어와 안방 침대에 맥없이 쓰러진 뒤,
너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6시에 집을 나설테니까.
p166
여러 달이 지나갔다.
날이 갈수록, 시간은 점성을 잃었다.
나는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지 느리게 흐르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나는 거기서 큰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일본에서, 존재는 바로 회사라는 사실을.
물론, 이것은 이 나라를 다루고 있는 많은 경제 서적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에셋이에서 한 문장을 읽는 것과 그것을 체험하는 것은 천지 차이가 있다.
나는 존재라는 것이 이 회사 직원들과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깊이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내가 겪은 고난이 그들의 고난보다 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더 치욕적이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그들의 처지를 부러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의 처지는 나만큼이나 비참했다.
오랜 옛날부터, 서민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현실에 삶을 바쳐 왔다.
적어도, 과거에는 이렇게 무의미하게 삶을 바치면서 어떤 절대적인 대의가 있다고 상정이라도 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환상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아무 명분도 없이 자신들의 존재를 던지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 밖에서, 숫자로 뇌가 세척된 경리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만큼이나 두개골에 구멍이 생긴 동료들과 의무적으로 맥주를 마시고
터질 듯한 지하철을 몇 시간이나 타는 것, 이미 잠든 아내, 벌써 무감각해진 아이들,
물 빠지는 세면대처럼 당신을 빨아들이는 잠, 아무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모르는 드문 휴가.
삶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제일 끔찍한 것은,
이 사람들이 지구 상에서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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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뇌된 일빠 아멜리노통브의 처~절한 자전적 소설 ㅋㅋㅋㅋ
프랑스어는 모르지만, 번역된 본문으로도 느껴지는 아멜리상의 문장력.
낱낱이 파헤치고야 마는 그 언어적 의지 ㅎㅎㅎ 개그욕심도 충만함
나 스스로도 둔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보수적 사회의 통념같은걸
서양인의 눈을 빌려 읽으며 곱씹어 본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러한 무의식적 일상을 계속하지 않는 것
디폴트 세팅에서 벗어나 사고 하는 것
응!